잘근잘근 되새김

노예의식에서 비판의식으로

지구별 여행 2015. 5. 26. 01:05

[전태일 평전/조영래, p127~129] 에서 가져온 글

 

그러므로 고통받는 한 인간의 의식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억눌리는 고통에 찬 현실은 존재하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자라면서 그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하여 끌려가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바로 인간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에 비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조만간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현실의 사회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기에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어서 비굴해진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무모한 짓이 되며,

따라서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정신의 싹을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무조건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자기 머리로 생각할 줄 모르는, 주체성을 빼앗긴 정신적 노예로 길들여진다.

 

등 어루만지고 간 빼 먹는다는 말이 있다.

강한 자들은 이 길들여진 양들에게 '착실', '겸손', '온건', '성실', '적응성 있다'하는

온갖 아름다운 찬사를 퍼부으며 환영하고 칭찬하면서 최대한으로 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털을 뽑는다.

고통받는 인간은 한동안 얼떨떨하여 그가 고통을 당하는지 털을 뽑히는지 모른다.

설사 어렴풋이 그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다만 생존하기 위하여 현실의 부당한 행태와 그로부터 오는 자신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만다.

때때로 무언가 '부당하다' 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나,

역시 자신은 '무력'하며 그것은 시정될 길이 없으므로 머리를 흔들며 그런 건방진 생각을 털어버린다.

인내는 그의 영원한 금과옥조가 된다.

 

그러나 억압과 혹사, 그로 인한 고통이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존립을 위협하게 될 때

잠자던 비판의식은 돌연 고개를 쳐들어 절실하게, 부지런히 활동을 개시한다.

고통이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한 인간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극한점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고 무엇이 추잡한 것인가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재생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자존심이 되살아나고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한다.

저항이 시작된다.

그것이 철저해질 때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현실의 질곡이 결코 인간이 뚫을 수 없는 금성철벽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