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여행기

서울 땅밟기 - 노량진 수산시장

지구별 여행 2015. 4. 22. 11:13

 

3월 셋째 주 토요일. 맑은 봄 날씨. 상쾌한 아침 공기.

호는 장애인콜택시(이하 ‘장콜’)를 타고 시흥동 집을 나선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경사로를 올라 맨 뒤 칸에 자리 잡는다. 기사는 휠체어의 앞뒤로 고정벨트를 장착한다. 기사가 고정벨트를 고리에 제대로 끼우는 것을 확인한 후, 활동보조인(이하 ‘활보’) 수는 전동휠체어 칸의 앞좌석 오른편 창 쪽에 앉는다. 곧 뒷문이 닫친다. 기사가 운전석으로 돌아와 출발한다. ‘자, 이평호씨.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갑니다.’

 

 

장콜은 아파트의 회전교차로를 돌아 나온다. 호는 장콜이 시간 맞춰 도착한 것에 안심하고 차창 밖을 본다. 아파트 화단과 언덕에 아직도 개나리와 벚꽃나무가 겨우내 메마른 모습 그대로인 것이 보인다. 창밖 바라보기는 잠깐. 거치대에 꽂혀 있는 스마트폰으로 눈을 돌린다. 페이스북에서 뉴스와 페친들의 소식을 훑어 내린다. 오른손 엄지로 천천히 스크롤한다. 이따금 올라오는 새로운 장애인 보조기구 기사나 동영상은 꼼꼼히 챙겨본다. 노량진수산시장을 처음 가보는 터라 위치가 어딘지, 제철 수산물은 무엇인지, 시세는 어떤지 인터넷 조사는 이미 어제 마쳤다. 지난 5일 동안 재택근무에 지친 몸과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지금 마냥 좋다. 

 

 

수는 무심히 창밖을 바라본다. 호야의 외출을 준비하느라 아침기상부터 면도, 식사, 샤워, 옷 갈아입기까지 두어 시간 넘게 서서 움직였기 때문에, 장콜 의자에 등을 기대어 앉는 이 한 시간이 수에게는 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스쳐가는 풍경, 길 가 상점들, 인도의 사람들을 보는 재미와 창으로 와서 닿는 봄 햇살을 즐길 셈이다. 몇 주 전 Y(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범과 민이 일하는 곳)에서 만났을 때, 민이 요즘 대게철이라며 노량진 수산시장을 가자고 제안했다. 범이 대천바다도 좋다고 하였지만, 전동휠체어로 가기에는 대중교통편이 여의치 않기에 노량진 수산시장을 가기로 했다. 수는 서울에 온지 3년이 지났지만 노량진 수산시장은 처음이라 설렌다.

 

'어디서 만나기로 했나요?'

'노량진역에서요.' 

'그럼 노량진역 앞 지나 저기 횡단보도 근처에서 내리시면 되겠는데요.’

장콜은 노량진역 버스정류장을 지나면서 갓 길로 이동한다. 요금계기판은 10시 반 약속시간을 살짝 지난 시각을 알린다. 

 

 

'앗, 범이다.’ 호가 반갑고 놀란 목소리로 외친다. 수는 낯선 풍경에 두리번거리며 창 밖으로 범이를 찾는다. 호는 다시 외친다. ‘범이가 버스에서 막 내렸나봐. 희경샘이랑 왔어.’ 이윽고 수도 범이의 전동휠체어와 경을 발견한다. 중앙차선 버스정류장에서 횡단보도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김범준!’ 수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호야 대신 범이와 경을 불러 세웠다. 곧 장콜이 멈추고 호의의 전동휠체어가 내린다. 수는 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 길치 범이가 웬일이지? 오늘은 빨리 왔네.’ 호가 빙긋 웃는다. 지난 달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모임에서 범이의 ‘지하 미로 속 뺑뺑이 돌기’와 ‘범이 찾아 삼만리’를 떠올린다.

 

 

범이와 호, 경, 수는 횡단보도에서 만나 같이 건넌다. 인도에 올라서 멈춘다. 반갑게 인사를 서로 건넨다. ‘민이는 아직 장콜이 안 와서 출발도 못했대. 우리 먼저 가서 보다가 민이랑 합류하자.’ 범이 먼저 민이와 통화를 했던 터라 소식을 알린다. 네 사람은 어느 방향으로 갈지 이쪽저쪽 살핀다. 모두 노량진 수산시장은 처음 와본다. ‘이 쪽인 거 같은데.’ 범이 오던 방향으로 더 가려고 한다. 그러자 경이 ‘그럼 그 쪽으로 안 가야겠네.’한다. 그러자 서로 마주보며 웃는다. 범이의 신빙성 없는 길 찾기 실력을 놀린 것이다. 범이도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수가 재빨리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묻는다.

'안녕하세요.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가는데요, 여기 전동휠체어 타신 분들이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하나요? 혹시 저기 지하철 노량진역에서 반대방향으로 넘어갈 수 있나요?’

아주머니는 우리가 왔던 방향에서 반대쪽을 가리키며, ‘저기 노량진역 앞을 지나서 수산시장 간판이 나올 거예요. 간판을 지나가다 보면 오른편에 지하도처럼 수산시장으로 가는 골목이 있어요. 그 길 따라 쭉 들어가요. 지하철역에는 수산시장 방향으로 가는 출구가 없어요.’ 한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도 같은 방향으로 앞서 가며 몇 번인가 돌아보면서 ‘좀 더 가면 되요.’ 하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아주머니는 지하철역으로 가면서 다시 한 번 조금 더 가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라고 한다.

역시 길 찾기에서는 범이를 따라가면 안 된다는 둥, 이제 범이는 가만히 우리를 따라오라는 둥 세 사람은 범이를 놀린다. 범이도 껄껄 웃으며 호와 나란히 간다. 경과 수는 최근 경이 새로 사업을 시작한 애터미의 화장품에 대해 이야기하며 뒤따라간다.

 

 

이윽고 인도 한 곁에 노량진 수산시장을 안내하는 간판을 지나자, 오른편으로 꺾어진 길이 있다. 나지막한 지하도 입구를 지나니, 길 가에 앉아 야채를 파는 상인들이 양쪽에 줄지어 있다. 여기저기 쑥, 달래, 냉이, 민들레와 같은 봄나물들이 보인다. 지하도를 따라 야채노점을 구경하며 5분 정도 걸어가니 청과시장 가는 길과 수산시장 가는 길이 양쪽으로 나뉘는 곳이 나타난다. 범, 호, 경, 수는 잠시 멈춘다. 가요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가 요란하게 트로트를 흘리며 지나간다.  경이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라며 반가워한다. 호는 수산시장에서 바가지 안쓰려고 인터넷에서 해산물 시세도 알아보고, 어떤게 싱싱한 것인지,  처음 시장 오는 사람처럼 안보이는 팁을 찾아봤다며 신나게 재잘거린다.

 

 

조금 더 걸어가 수산시장 큰 건물 입구에서 멈추어 선다. 입구까지 과일노점상들이 딸기며, 바나나, 사과들을 펼치고 있다. 오른편에는 성당 간판이 있는데, 철문이 낡아 보이고 열린 문으로 보이는 성당 건물과 마당은 마치 공사장 같다. 성당 문 앞 한 쪽에 포장마차가 있다. 범이 굶주린 표정으로 호떡을 먹자고 한다. 넷이 포장마차를 둘러싸고 서서 차례로 호떡을 하나씩 종이컵에 받아든다. 민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셈이다. 경과 수는 따가운 햇살을 피해 성당 문 앞 그늘진 곳에 빈 과일박스를 깔고 앉는다.

 

 

'오늘 우리 일정이랑 회비는 어떻게 할까?’ 호야가 세 사람을 둘러보며 묻는다.

'어...우리가 먼저 시장을 둘러보고, 민이가 도착하는 대로 같이 사자. 둘러본 다음 회비를 정하면 어떨까.’범의 제안에 세 사람 모두 동의한다.

 

 

잠시 쉰 후, 네 사람은 수산시장 건물로 들어선다. 그늘로 들어서자 공기가 서늘하고 차기까지 하다. 다닥다닥 붙은 수산물가게들이 길바닥까지 대야며, 박스, 판을 펼쳐서 각종 활어, 대게, 랍스터, 새우, 멍게, 해삼, 낙지, 쭈꾸미... 이름도 모를 해산물들을 선보이고 있다. 번쩍번쩍 전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줄기들은 누워 있는 해산물의 물에 젖은 살갗에 부딪혀 생기를 더한다. 긴 앞치마와 장화를 신은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저마다 무어라 외치며 손님들을 부른다. 통로는 오가는 사람들과 얼음 운반차, 오토바이들, 수산물 박스를 실은 카트들로 북적인다. 범이와 호야는 사람들을 피해 전동휠체어를 운전하면서 수산물들을 구경한다. 수는 호야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가며 외친다. ‘휠체어 지나갑니다. 발 조심하세요.’경은 스마트폰 메시지를 확인하며 조금 뒤쳐져 따라간다.

 

 

‘우와, 대게가 크네요. 저런 건 얼마예요?’ 호야가 대게집 앞에 멈추며 주인에게 묻는다. ‘이거요? 키로에 삼만 오천 원이요. 우리 건 크고 살이 많아요.’ 화장을 환하게 하고 인상이 좋은 아주머니가 대게를 잡아들며 말한다. 호야는 재빨리 ‘저희가 이제 막 둘러보기 시작해서요, 좀 더 둘러보고 올게요.’한다. ‘그러셔요. 같은 대게라도 살이 차고 안 차고에 따라 값이 달라요. 우리 건 살이 꽉 차서 좋아요. 둘러보고 와요. 잘 해줄게요.’

범이와 호야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차례차례 구경한다. 값도 물어보고 흥정도 한다. 큼지막한 킹크랩 한 마리에 10만원 훌쩍 넘는 놈도 있다. 이집 저집 기웃거리다 범이와 호야는 대게(홍게) 4마리, 광어와 숭어로 회 두 접시, 새우나 멍게를 사는 것으로 정한다.

 

 

범이 민에게 전화하니 조금 있다 도착한다고 한다. 범은 전화하느라 뒤처진 경을 찾아와 네 사람은 다시 시장 입구로 나가 민이를 기다리기로 한다. 호와 수는 햇살 바른 곳에 나오니 좋아한다.

‘자, 회비는 얼마로 거둘까?’

‘민이까지 우리 세 사람은 오만 원씩 내고, 활보샘들은 이만 원으로 하면 어떨까?’

‘나는 많이 먹으니까 삼만 원 낼래요.’ 수가 말하자, 범이 웃는다.

‘그럼 20만 원정도 되나? 무엇을 어떻게 나눠서 살까?’

‘대게 4마리하고, 회, 새우 사고, 아, 술도 사야겠구나.’

‘상추, 깻잎 같은 야채도 사야될 걸’

‘돈이 좀 모자라겠는데, 한 이삼만 원정도.’

‘아, 민이 와이프랑 딸도 있고, 활보도 있으니깐, 민이한테 좀 더 내라고 하면 어때?’

‘민이 오면 물어보자.’

민이는 세 사람 중에 유일하게 결혼하고 딸까지 있다. 부인도 중증장애인이라서 활동보조인이 가사를 돕는다.

 

 

민이 시장 주차장 입구 쪽에 도착했다고 전화 온다. 범이 민이를 찾아오겠다고 시장 건물로 간다. 장콜이 시장 건물 건너 반대쪽 주차장으로 들어와 민이를 내려놓은 것이다. 호야와 수도 범이 휑하니 달려간 쪽으로 뒤따라간다. 수는 호야의 전동휠체어가 사람들이나 짐 나르는 카트와 부딪치지 않도록 안내하면서 뛰었다 걸었다 반복한다. 주차장 입구가 어느 쪽인지 알지 못하였는지 범이는 직진하고 있다. 직진인지, 좌회전인지 두 갈래 길에서 멈추어선 호야와 수는 잠시 두리번거린다. ‘앗, 저기 민이다.’ 수가 먼저 왼쪽편 차량통행입구 쪽에서 나타난 민이를 발견하고 외친다. 멀리서 민이도 이쪽을 알아보고 웃으며 휠체어를 달려온다. ‘민이 여기 왔어요.’ 범이 사라진 방향으로 수가 외친다. 곧 범이 다시 나타난다. 셋이 반갑게 웃는다. 범이 앞장서고 세 사람은 뒤따라가며 경이 기다리는 시장입구로 향한다. 시장건물을 통과해서 따라가며 뒤늦게 온 민이 기웃기웃 구경한다. 시장입구에서 기다리던 경에게로 와서 모두 모여 선다.

 

 

 

 

 

반가이 인사를 나눈 후, 범이 일정을 말한다. ‘호야랑 대충 보면서 어디서 뭘 살 건지 정했어. 대게랑 회, 야채, 술 등등... 셋이 같이 가서 사자. 그리고 지금 각자 장콜을 불러서 오는 순서대로 민이네 집으로 가서 모이자. 먼저 간 사람이 요리를 해놓고, 상을 차리자.’

‘민아, 집에 대게 찔 찜솥은 있어?’

‘집사람한테 물어볼게.’ 민이 영에게 전화한다.

‘찜솥 있어? 상추랑 야채는 있어? 술은?’

아내와 통화를 마친 민이 말한다. ‘찜솥은 있고, 술은 많대. 야채는 사야 된다네.’

 

 

각자 회비를 내고 수는 22만원을 모아들고, 무엇을 살 건지 목록이랑 금액을 봉투지에 적는다. 다섯 사람이 함께 시장 건물을 들어간다. 영남수산과 부여상회에 들러 대게 큰 놈 4마리에 14만원, 회 두 접시와 매운탕거리 포함 6만원, 새우 2만원어치를 산다. 범이와 경은 야채를 사러 가고, 수와 민은 2개의 아이스박스에 담은 수산물을 나누어 들고 호야를 따라 간다.

 

 

다섯 사람은 주차장 한 곁에 서서 장콜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먼저 범이 예약한 장콜이 배차되었다고 메시지가 온다. 장콜 기사가 20분 쯤 후에 도착할 것이라고 전화로 알려온다. 민과 수는 수산물 2박스를 범이와 경에게 넘긴다. 요리를 잘하는 경이 먼저 가게 된 것이 다행이다. 수는 같은 활보지만 요리에는 영 자신 없어 한다. ‘난 설거지랑 뒷정리는 잘해요.’ 수가 나름 그거라도 잘한다고 하자 모두 웃는다.

 

 

범과 경이 먼저 출발하고, 10분 후 쯤 민이 출발. 마지막에 호와 수가 노량진 수산시장을 떠난다. 신정동 민이네 집을 향해.

 

 

 

네이버 밴드에서 호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어제는 참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이었어... 집에서 가족들이 사다 주는 것만 먹을 때는 (나도 시장 같이) 가고 싶었는데... (가족들은) 시장은 좁고 사람들이 많아 갈 수 없다고 그랬다...  

음식이라는게 먹는 재미도 있지만 사는 재미, 흥정하고 구경 하는 재미도 있는데... 이게 자립생활의 재미가 아닌가 싶다ㅋㅋㅋ'

 

범이와 민이도 이렇게 글을 남긴다.

'나도 이런게 자립의  재미라고 생각해! ㅋ~~'

'자립의 재미를 많은사람에게 전합시다 ㅋ'